평택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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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지정번호 : 보물 565호 (지정일 : 1972. 3. 2)
소 재 지 : 현덕면 덕목리 115 심복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현덕면 덕목리에 위치하고 있는 조계종 사찰인 심복사의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모셔지고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121cm, 연대의 높이 107cm, 상대직경 113cm, 하대직경 115cm로 현재 광배(光背)는 없고, 대좌와 불신(佛身)은 잘 보존되어 있다. 연화대좌 위에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고, 화강암을 재료로 하며, 굵은 나발(螺髮)에 육계는 낮고 평평하게 표현되었다.
타원형의 얼굴에 가늘게 뜬 눈은 옆으로 길게 표현하였으며 입은 단정하게 다물고 귀는 두텁고 크게 표현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어깨는 넓고 건장하며,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을 하고 있다. 법의의 좌우 옷자락에는 가슴 쪽으로 5단의 옷자락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양팔에도 옷 주름이 같은 형태로 표현되었고, 옷자락 끝단에는 반원형의 꽃잎을 두른 화문(花紋)조각이 어긋나게 표현되었는데, 다른 불상에서 표현되지 않는 특이한 점이다.대좌(臺座)는 8각을 기본으로 하여 상, 중, 하대석으로 구분되며, 하대석은 복련을 표현했다. 또한 중대석에는 두 마리 사자가 앙련(仰蓮)의 상대석을 떠받치고 있다. 대좌에 쌍사자를 표현한 것은 매우 특이한 형태로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불상은 어깨와 가슴이 벌어지고 신체 비례가 조화로우며,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좌상이 신라 하대에 많이 제작된 점으로 비추어 신라 하대의 것으로 판단되며, “일체의 무명번뇌를 끊고 부처님 지혜를 얻는다”는 비로자나불의 내면세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만기사 철조여래좌상
지정번호 : 보물 567호 (지정일 : 1992. 4. 20)
소 재 지 : 진위면 동천리 548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진위면 동천리에 위치하고 있는 조계종 사찰인 만기사의 대웅전안에 모셔진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 본래의 절이 폐사(廢寺)되고 옮겨지는 과정에서 광배(光背)와 대좌는 사라지고, 양손과 오른팔도 따로 떨어졌다. 현재의 불상은 양손과 오른팔을 접합하고 금(金)으로 개금(改金)하여 본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불상에는 나발(螺髮)의 머리에 둥글고 큰 육계가 얹혀져 있다. 갸름한 얼굴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으며, 반쯤 뜬 눈과 가름한 코, 근엄하게 다물고 있는 입, 뚜렷한 삼도(三道) 등 이목구비가, 나말 여초의 강건한 호족(豪族)의 기상에서 점차 귀족화되어 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느끼게 한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왼쪽 어깨에 걸쳐진 법의는 어깨 위에서 4단을 이루며 한번 겹쳐졌고, 왼팔로 흘러내리는 옷주름은 밀집되게 표현하였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가 142.5cm, 어깨의 폭이 58cm, 무릎 폭이 92cm이다.
철불(鐵佛)은 시기적으로 나말 여초 시기인 9세기 중엽 이후 호족세력이 대두하고 선종(禪宗)이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만들어진 불상이다. 만기사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나말 여초의 철불 중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여래좌상 보다 제작 연대가 늦고 규모도 작다. 규모면에서는 훨씬 크지만(288cm) 시기적으로는 비슷한 경기도 광주의 춘궁리 철불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이 강하고 단단한 근골, 강한 눈매, 강건한 기상에, 9세기 선종과 함께 유행한 비로자나불의 형식을 갖췄는데 비하여, 춘궁리 철불과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10세기에 나타난 항마촐지인의 수인(手印)에 석가여래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고, 기상이 많이 부드러워진 점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수인은 이 철불의 조성 시기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라는 시대적 배경과 관련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원릉군 원균 선무공신교서
지정번호 : 보물 1133호 (지정일 : 1992. 4. 20)
소 재 지 : 도일동 480
이 교서는 임진왜란 당시 무장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다 전사한 원균이, 전쟁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7)에 이순신 · 권율 등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록된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원균의 자는 평중이고 본관은 원주이다. 아버지 준량(俊良)과 어머니 남원 양씨 사이에서, 1540년 1월 5일에 태어났다.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임명되었을 때에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공이 매우 커서, 부령부사(富寧府使)로 특진되었다. 1592년에 원균은 경상우도(慶尙右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휘하에는 배가 3척 밖에 없었다. 이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옥포(玉浦) 앞바다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침시켰다. 왜적이 당포(唐浦)에 이르자 이순신의 원병과 합세, 곤양(昆陽)에서 격파하고 사천 앞바다로 추적해 무찔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자 갈등을 빚다가 1595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겼다가 1596년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투옥된 이후 원균은 그를 이어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7월 16일에 왜적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출격하다가 적의 유인 전술에 걸려 칠천도(漆川島)에서 패전하고 전사하였다. 1604년에 이순신 · 권율 등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봉해지고 좌찬성(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원릉군(原陵君)으로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