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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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향교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4호 (지정일 : 1993. 9. 19)
소 재 지 : 팽성읍 객사리 185
평택향교는 조선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농민학교로 사용하기 위하여 외삼문을 철거하기도 하였으나 1979년 4월 23일 당시 전교 박세홍(朴世洪)이 유림의 협찬으로 복원하였다.
향교는 서원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건축으로 공자와 그 제자 그리고 성현들을 모시며 강학을 하기 위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향교는 관에서 운영하는 국영교육기관이었으며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이들을 기리는 의식적인 공간인 제향공간과 공부를 하는 강학공간으로 구분된다.
홍살문을 지나 담장 중앙으로 들어서면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 · 서제에 이른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민도리양식이다. 명륜당 뒤편으로는 솟을 삼문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에 이른다. 배향공간인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맞배기와집이다.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짜올린 익공식(翼工式)건물이다.
홍학사 비각(포의각)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5호 (지정일 : 1983. 9. 19)
소 재 지 : 팽성읍 본정리 322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서 청나라에 끌려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3학사(三學士 : 홍익한, 오달제, 윤집)의 한사람인 홍익한(洪翼漢 : 1586∼1637)의 비각이 곧 홍학사비각이다.
그는 본관이 남양(南陽), 초명은 습( ),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化浦)) · 운옹(雲翁)이며, 찬성 숙(淑)의 현손으로, 진사 이성(以成)의 아들이며, 백부인 교위 대성(大成)에게 입양되었다. 이정구의 문인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었고, 1624년(인조 2) 공주행재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서를 거쳐 1635년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 등의 화의론(和議論)을 반대하였는데, 이 난으로 그의 두 아들과 사위를 모두 적에게 잃고, 아내와 며느리는 적에게 붙들렸으나 자결하였으며,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 살아남았다. 이듬해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으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두목으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濟) · 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으나 그들의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고 죽임을 당하였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글씨가 마멸되어 내용을 알아보기는 어려우며 2기의 비문이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평택유도회에서 매년 3월 31일에 제향을 드리고 있다.
진위향교 대성전
지정번호 : 경기도 문화재자료 40호 (지정일 : 1983. 9. 19)
소 재 지 : 진위면 봉남리 167
조선 초기에 건립된 교육기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래의 건물은 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지고, 위패는 교하리(校下吏) 최응수(崔應守)가 자기집에 소중히 간직하였다가 후에 초가집 두어 칸을 지어 봉안하였다. 1644년(인조 22) 진위현령 남두극(南斗極)이 향교 중수를 시작하여 기와집을 짓고, 1646년 부임한 현령 이산뇌(李山뇌)가 동헌(東軒)을 지었으며, 1660(현종 2) 현령 송박(宋朴)이 향교대청을 증수했다. 1665년 현령 이관하(李觀夏)가 향교담장을 개축했으며, 1839년(헌종 5) 부임한 현감 황종림(黃鍾林)이 명륜당을 개축하고 대성전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재(東齋) · 서재(西齋)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에 한식 골기와 건물이다. 외삼문(外三門)은 본래 맞배지붕인 것을 1990년에 증축하였다. 대성전은 조선 후기 건축양식이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한식기와를 얹었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양 측면에는 방풍판(防風板)이 있다.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한식기와 건물이다.
 
평택서천사석조여래좌상
지정번호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41호
소 재 지 : 평택시 고덕면 방축리 103-1
서천사는 용화전과 요사로 이루어진 작은 사찰이다. 서천사는 1352년 나옹화상이 창건하여 1623년 인조반정시 모두 불에 탄 후에 1870년 동파비구가 미륵불을 발견하여 사찰을 다시 지었고 1929년 중창불사가 있었다가 1953년 화재로 소실되어 1954년 법당을 짓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이 위치한 방축리는 현재 농토로 둘러쌓인 지역이지만, 일제침략기까지도 평택항을 내려볼 수 있던 어촌 마을이었다.
석조여래좌상은 서천사가 중창된 이후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석조여래좌상 전신에 회칠이 되었지만, 세부조각과 의습 표현 등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대웅전 내 수미단 위에 본존 우측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머리에 나발이 있고, 이마 위에 타원형의 중앙계주가 그려져 있다. 계란형의 얼굴에 지긋하게 감은 눈, 이마 중앙에 커다란 백호, 삼각형의 오뚝한 코, 붉은 입을 표현하였다. 법의는 대의 안쪽에 편삼을 걸친 변형우견편단으로, 왼쪽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완만하게 대의 자락이 늘어져 있고, 오른쪽 어깨에서 완만하게 내려온 대의자락과 편삼이 복부에서 겹쳐있다.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은 앞치마를 입은 듯이 반원형을 그리고, 양 발바닥이 모두 드러나 있다. 불상의 후면은 앞에서 넘어온 대의 자락이 생략되어 평평하게 처리되었다. 수인은 양손을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가지런히 놓은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평택약사사석조지장보살좌상
지정번호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69호 (지정일 : 2013. 11. 12)
소 재 지 : 안중읍 용성3길 120-10
약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신라 하대 842년에 염거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절이 자리한 설창마을은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 서부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 뒤쪽으로는 비파산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태고사법(太古寺法)에는 "경기도 진위군 청북면 비파산에 있다"라고 하여 약사사의 위치를 고증해 준다. 본래의 절은 상당한 규모였지만, 1950년 한국전쟁 때 불타 버렸고 현재의 약사사는 전쟁 후에 중건된 것이다.
약사사 대웅전에 보존되고 있는 높이 31㎝·무릎 폭 20㎝·깊이 17.5㎝의 석불로 조선 후기에 유행하던 나한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춘 아담한 체구의 석불상이다.
이 석불은 옷을 좌우 어깨에 걸친 통견 형식으로 법의를 착용했으며 머리에는 가슴 선까지 이어지는 두건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일반적인 지장보살은 긴 막대기 끝에 쇠고리를 댄 지팡이인 석장(錫杖)이나 여의주인 보주(寶珠 )을 지물로 삼는 것에 반해 약사사 석조지장보살좌상은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양 손 중 오른손 위에 연꽃을 올려놓아 극락세계에서 모든 신자가 연꽃 위에 신으로 태어난다는 불교 신앙을 잘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