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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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리 봉수대
지정번호 : 향토유적 1호 (지정일 : 1986. 3. )
소 재 지 : 포승읍 원정리 109-54
봉수대는 포승면 원정 7리, 8리 일대의 봉화재(봉우재, 해발 83m) 정상에 있으며,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세장방형의 평면형태를 하고 있다. 단면형태는 상단지대와 하단지대를 갖춘 이중구조로 되어 있어 모양이 철(凸)자 형태를 띄고 있다. 둘레의 길이는 하단대지가 239m, 상단대지가 138m이며, 하단은 토축(土築), 상단은 석축(石築)으로 쌓았다. 넓이는 하단이 1,700㎡이며, 상단이 700㎡이다. 내부 시설물로는 봉돈으로 추정되는 원형돌무지 4개소, 건물지 1개소, 출입시설 3개소가 있다. 봉돈 추정 원형 돌무지는 지름 3.5m, 높이 0.3m의 크기이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해안봉수로 직산의 망해산 봉수를 거쳐 북상하는 직봉(直烽)과 전북 옥구의 화산에서 갈라져서 서천과 보령, 서산, 당진을 거쳐 올라온 간봉(間烽)이 만나는 대단히 중요한 봉수였다.
정도전선생 사당(문헌사)
지정번호 : 향토유적 2호 (지정일 : 1986. 3. 5 )
소 재 지 : 진위면 은산리 189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이며 학자인 정도전(鄭道傳)을 모신 사당이다. 그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며, 형부상서 운경(云敬)의 맏아들이다.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394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집필, 편찬하여 관제 등 모든 제도와 그의 운영 방침을 제정, 조선 법제의 근본을 이루었다. 성리학적 이념과 새로운 사회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군사, 외교, 행정, 역사, 성리학 등의 분야에서 폭넓게 활약하였으나, 왕권투쟁으로 인한 제1차 왕자의 난 때 뒤에 태종이 된 이방원에 의하여 1398년 8월 26일 생애를 마감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870년(고종 7년) 봉화 정씨 문중에서 양성현 성은면 은정동 (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287번지)에 500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사우를 건립하였다. 그 뒤 1930년 당초의 종가터(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202번지)에 이축(移築)하였고 1970년 중개축을 하였는데, 사당 5칸, 삼문 3칸, 홍살문으로 맞배지붕의 한식 골기와를 얹은 사당이다. 사우 명칭은 그의 시호를 따서 문헌사(文憲祠)라 하였고 유종공종(儒宗功宗)이란 현판이 달린 사당 내에는 그의 위패와 영정을 모셨다. 종중을 중심으로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린다.
한온장군충신정문
지정번호 : 향토유적 3호 (지정일 : 1986. 3. 5 )
소 재 지 : 서탄면 금암리 594
이 정문은 1555년(명종 10) 을미왜변 때 전라도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재직하던 중 달량포(達梁浦)에서 왜구와 싸우다가 전사한 한온(?∼1555)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그 뒤 1696년(숙종 22) 애국충절을 기려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리고 충신정문을 세우게 했다. 현재의 정문 규모는 정면 250cm, 측면 215cm이다. 내부의 왼쪽 현판에 “鐵腸石膽一心殉國(창자는 쇠붙이와 같고 쓸개는 돌과 같아라. 그 마음은 나라에 바쳤도다)”라는 기록은 그의 순절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수성군 묘 및 사당
지정번호 : 향토유적 4호 (지정일 : 1991. 7. 11 )
소 재 지 : 독곡동 산53
조선 세조 때에 무관이었던 최유림(崔有臨 : 1426∼1471)을 모신 사당과 그의 묘이다. 본관은 수성이고 자는 자앙(子昻)이다. 1450년(세종 32) 무과에 급제하여 고성현령 · 의금부진무 등을 역임하였고, 1455년(세조 1) 사직(司直)으로서 세조 즉위의 공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64년(세조 10) 중추원부사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전라도처치사로 나갔으나 앞서 명나라에 갔을 때 사무역(私貿易)을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고신(告身)을 박탈당하고 지방으로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공현위장(控弦衛將)이 되어 충청도병 1,000명을 이끌고 석장현(石場峴)싸움에서 적장 김말손(金末孫)을 사로잡는 등 공을 세워 적개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오위장에 임명되는 한편 수성군에 봉해졌다. 그해 겨울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병을 얻어 고향인 독곡동으로 낙향하여 죽었다. 이에 성종이 슬퍼하며 안양(安襄)이라 시호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를 증직하는 한편, 진위군 우동(牛洞)에 치장(治葬)하도록 하며 신도비와 사당을 세워 후손이 받들도록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에 수성최씨 안양공파의 맥이 이때부터 이곳에서 이어져가게 되었다.
수성군 사당은 본래 진위현 탄현면 오좌동(현 평택시 독곡동 262)에 위치하고 있었고, 본관 5평 6홉, 외삼문 2평 5홉이었는데, 긴 세월에 10여회의 중수를 하였으나 더 이상의 수리 · 보수가 곤란하였다. 이에 1979년 문중에서 다시 신축하기로 하여, 1980년 4월 철거하고 구 사당 주위의 종중산(宗中山) 182평을 대지로 조성하였으며, 1982년 본관 11평 1홉, 외삼문 5평, 담장 110m의 규모로 신축하기 시작, 이듬해 6월 준공되었다. 한편 사당 옆에 세워진 신도비는 본래의 것은 마멸되어 없어져, 1972년 다시 세웠다.
충의각
지정번호 : 향토유적 5호 (지정일 : 1991. 7. 11 )
소 재 지 : 이충동 산 37-1
이곳은 조광조와 오달제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충의각은 정암 조광조와 추담 오달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각(閣)으로, 각(閣) 안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비의 규모는 비신 55×16×123cm, 비대 67×49×15cm이다. 유허비의 상부에는 ‘송장(松莊)’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아래로 조광조와 오달제의 유허지임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
입석 당시 진위 유림에서 조광조 · 오달제 선생의 자취가 있음을 길이 전하고자 나라에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고 전하며, 비의 위치는 오달제 선생의 옛 집터가 있는 산 윗부분에 해당한다. 이 비는 1950년대까지 길 옆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부터 동령마을 주민들에 의해 보호 · 관리되었으며, 1990년에 문화원이 기와를 보수하고 단청을 다시 하였다.
원균 사당
지정번호 : 향토유적 6호 (지정일 : 1991. 7. 11 )
소 재 지 : 도일동 산84
이 사당은 임진왜란 당시 무장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다 전사한 원균을 모신 사당이다. 1604년 이순신 ·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책록되어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원릉군(原陵君)에 추증되었다. 이때 국가에서 사당을 세워 후손에게 제향하도록 하였던 듯하며, 본래의 건물은 경기도기념물 제 57호인 묘역 앞에 있었으나 사당에 물이 들고 낡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매년 음력 7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91년 7월에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뒤 1992년에 송탄시에서 수리 및 개축하였다. 규모는 대지 50여 평에 사당 본채 11평, 외삼문 5평의 기와집으로 되어 있다.
원정리 유적
지정번호 : 향토유적 7호 (지정일 : 1997. 4. 26 )
소 재 지 : 포승읍 원정리 산 109-430
원정리 멍거니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95년 평택항 조성사업 과정에서 대규모의 패총유적이 확인되어 1년간의 발굴조사 끝에 실체가 드러났다.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에 패총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고, 조선시대 온돌집자리 유구 20여기가 발견되었다. 집자리 내부 퇴적토에서 상평통보 한 점이 출토되었다. 현재 멍거니산은 개발되어 접안시설 및 물류기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의 입구 일부분만이 남겨진 자리에 온돌집자리터가 보존되어 있다.
신숙주 영정 및 감실 주독
지정번호 : 향토유적 8호 (지정일 : 1997. 7. 24 )
소 재 지 : 청북면 고잔리 905
조선 전기의 정치가이며 학자인 신숙주의 영정과 감실 주독으로 고잔리에 있는 고령 신씨 사당에 함께 모셔져 있다. 영정의 크기는 166cm×98cm이다. 명 나라의 화공에 의하여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20년 뒤에 개장(改粧)한 이모본(移模本)이 구봉령당(九峰靈堂 : 충북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13)에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어 소장되고 있다. 고령신씨 사당에 원래 모셔져 있는 것은 망실(亡失)되어, 1890년에 구봉령당본을 이모한 것이다. 구봉령당본과 화폭재료만 다를 뿐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나 복식의 표현에 있어 매우 유사하며, 조선전기에 유행하였던 공신도(功臣圖) 형식을 따르고 있다. 주독은 신주를 모셔 두는 궤로서 가로 30cm, 세로 45cm로 밤나무로 만들어졌다.